'흉기난동' 판치는 세상… 정당방위 확대 목소리 커진다 [정구승 변호사]
언론 보도
23-08-21
본문
최소한의 방어행위만 정당방위
법원 60년간 인정사례 14건뿐
전문가 "관련 법령 수정 필요"
#.부산의 한 오피스텔 관리소장 A씨는 입주민으로부터 몽키스패너 등으로 폭행을 당하자 호신용 스프레이를 분사하고, 목을 누르는 식으로 제압했다. 지난 6월 법원은 이를 두고 A씨의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소극적인 저항행위를 넘어 적극적인 공격행위가 이뤄졌다고 보고 특수폭행죄를 적용, 벌금 150만원을 선고했다.
잇단 흉악범죄로 호신용품 구매가 늘어나고 있지만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법원에선 소극적인 방어행위에 대해서만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있어 인정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파이낸셜뉴스가 법원 판결문 열람시스템을 검색한 결과 흉기로 위협을 받아 이에 대응하기 위해 폭행을 하는 등 대부분의 상황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정당방위가 인정되려면 △현재 부당한 침해가 있을 것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어하기 위해 한 행위일 것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 등이 성립돼야 한다. 하지만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정당방위의 확대와 대처방안' 논문에 따르면 1953년 형법이 제정된 이후 60여년간 법원이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는 14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지난해 6월 서울 영등포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던 C, D씨는 지인들을 칼로 찌른 남성들에게 골프채를 휘둘러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상황이 일단락된 상태에서 폭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현재성이 결여돼 정당방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이들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2021년 7월 인천에서도 채무 문제로 다투던 중 과도와 문구용 칼을 휘두른 남성을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E씨에 대해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왔다. E씨가 남성의 손을 걷어차 과도를 떨어뜨렸고, 해당 남성이 문구용 칼을 다른 곳에 던지는 등 공격 상황이 종료된 이후 폭행이 이뤄졌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E씨에게도 벌금형(30만원)이 내려졌다.
과거부터 정당방위 논란은 있어왔다. 지난 2014년 강원도 원주에서 집에 침입한 도둑을 주먹으로 때려 넘어뜨리고, 빨래 건조대와 허리띠 등으로 때려 뇌사 상태에 이르게 한 B씨에 대해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아 논란이 된 바 있다. 재판부는 첫 폭행은 방위행위이나 도망가려는 도둑을 폭행한 것은 방어행위를 넘어선 행위라고 판단, B씨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반면 지난 2015년 서울 공릉동에서 집에 침입한 군인이 예비 신부를 살해하고 본인도 살해하려 하자 몸싸움 끝에 군인을 숨지게 한 남성의 경우 경찰·검찰 모두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살인 사건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된 것은 25년 만이었다.
이승우 법무법인 법승 대표변호사는 "우리나라 정당방위 규정은 다른 나라와 비슷하지만 법원이 협소하게 해석해서 인정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며 "폭행 사건의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정당방위 관련 법리는 변동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라고 말했다.
정구승 일로 청량리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지금처럼 위험 사회가 된 상황에서 법리가 바뀔 필요가 있어 보인다"며 "본질적인 해결 방안은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례를 바꾸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에 법령을 구체적으로 수정하는 등 입법적인 해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서민지 기자 jisseo@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