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했던 말들은 모두 가스라이팅이었다. ‘이래야 ㅇㅇ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 ‘부모님 기대가 큰데 네가 잘해야 한다’ ‘네가 아니어도 다른 애들 많아’…. 모두 다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 했던 말들이다.” A씨는 억양도 톤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한 사람에게 당한 성폭행 피해 기억을 털어놓았다. 가해자인 B씨는 A씨가 고등학생 때 다녔던 학원 원장이었다. B씨는 A씨가 학원을 그만둔 후에도 해당 거주지역을 벗어나기 전까지 괴롭혀 왔다. 

A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신원을 유추할 수 있을 만한 지역도, 소재지도, 나이도 기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성범죄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특정된다면 가족과 지인들이 알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A씨는 “이미 10년도 지난 일이라 신고도 어려울 것”이라면서 법적 대응이나 신고 없이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라고도 했다. 결국 A씨가 더듬은 끔찍한 기억의 밑바닥에도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스라이팅해 미성년 성폭행  

가스라이팅을 이용한 범죄가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A씨와 같은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뿐 아니라 가스라이팅이 사기, 폭행, 살인으로 이어지는 등 사례도 매우 다양하다. 19년간 C씨 일가족을 가스라이팅하며 C씨 자녀 간 성관계 강요 및 불법촬영을 비롯해 피해자에게 수억원을 갈취한 무속인 부부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재판부는 지난 12월 21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촬영물 이용 등 강요) 등의 혐의로 무속인 남편은 징역 15년을, 그의 아내에게는 징역 10년을 각각 선고했다. 

가스라이팅을 당해 자녀들을 학대한 혐의를 받은 C씨도 무속인 부부와 함께 구속됐지만 검찰 수사 단계에서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정황이 발견돼 풀려났다.

‘이은해 계곡사건’도 있다. 이은해는 내연남 조모씨와 함께 남편 윤모씨의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2019년 6월 경기 가평 용소계곡에서 윤씨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그는 2019년 2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복어 매운탕을 끓여 윤씨에게 먹이고, 낚시터에서 윤씨를 물에 빠트려 살인을 시도한 혐의도 받았다. 검찰은 기소 당시 이은해가 윤씨를 가스라이팅하던 상태로 용소계곡에 함께 갔고, 약 4m 높이에서 강제로 다이빙하게 한 것이 직접(작위) 살인죄에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여수 졸음쉼터 살인사건’ 역시 진범이 피해자들을 가스라이팅해 왔던 것으로 경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지난 9월 전남 여수의 한 도로 졸음쉼터에 주차된 차 안에서 30대 남성 1명이 패혈증으로 숨지고 또 다른 남성 1명이 중태에 빠진 채 발견됐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제3자인 이모씨가 자신이 정신적으로 지배하던 피해자들을 차량에서 생활하도록 한 뒤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서로를 폭행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인과 부부 간 발생하는 가스라이팅은 스토킹을 비롯해 디지털성범죄, 살인 등 각종 범죄로 번지기도 한다.

대학원생 D(25)씨는 1년 전 사귄 남자친구가 연인 간의 사랑 행위를 넘어 ‘더 자극적인 것’을 요구하자 이별했다. D씨는 “교제한 지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전 남자친구가 자신의 성적 취향이라면서 스와핑(Swapping)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면서 “스와핑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찾아보고 나서 기겁했다”고 말했다. D씨는 “전 남자친구는 내가 기념일 이벤트 등으로 기분이 좋아 보일 때마다 집요하게 물어봤다”면서 “그럴 때마다 크게 싸웠고 이 문제로 이별했다”고 토로했다.

D씨 말처럼 ‘파트너 교환’ 혹은 ‘부부 교환’을 의미하는 스와핑은 트위터나 텀블러 같은 소셜미디어(SNS)에서 성행하고 있다. 파트너 구인글뿐만 아니라 성행위 영상이나 성행위를 인증하는 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스와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폴리아모리(Polyamory)라는 성적 취향으로, 스와핑이 자신들의 단조로운 성생활에서 탈피할 수 있는 유흥이라고 주장한다. 서로 간 합의 속에 이뤄지는 스와핑은 범죄로 보기 어렵지만 상대방의 스와핑 요구에 동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부인 혹은 애인이 스와핑으로 넘어오도록 온갖 회유와 설득을 하고 있다’는 인증글을 찾아볼 수 있다.

스와핑에도 가스라이팅 도사리고 있어 

한 성폭력 대응 전문가는 “스와핑도 당사자가 원치 않는데 배우자나 애인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다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자체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영상이 촬영되고 유포된다면 명백한 성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남성 파트너에게서 오랫동안 설득이나 회유, 강압 등의 방식을 경험하다가 결국 자포자기 심정으로 응했을 때 겉으로는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보이지만 실제 그 과정에서 진정한 합의와 자발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이 역시 가스라이팅과 그루밍 범죄(피해자와 신뢰관계 형성 후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저지르는 범죄)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폭행과 협박 등을 수반하지 않고 특정 대상에 대한 정서적 교란을 일으켜 범죄로 이어지는 가스라이팅은 최근에서야 구체적 처벌 수위 등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가스라이팅 행위 자체만으로는 법적 처벌이 어렵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영국에선 비교적 최근 고등법원 내 가정법원에서 연인 사이에서의 가정폭력 및 성폭행 사건과 관련한 판결문에 ‘가스라이팅’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조작했다는 행위만으로는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국내 사법기관은 2021년 6월부터 ‘가스라이팅 기반 범죄’를 양형 이유에는 기재하고 있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은 “가스라이팅은 법률적 개념이 아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이 법률요건으로 들어오기에는 여러 가지 유추해석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굉장히 신중할 수밖에 없다. 아직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라고 설명했다.

정구승 법률사무소 일로 대표변호사는 “적용할 수 있는 법령이 없을뿐더러 법령을 만들기도 애매하다”면서 “어디까지를 가스라이팅으로 규정해서 입증할 것인지, (피해자의) 의사가 어떻게 배제됐는지를 확인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신진희 성폭력국선변호사도 “형법상 죄명이 아니다. 어떠한 범죄 유형이 있고 그 결과로 피해가 발생해야 처벌을 하는 것으로 단순히 가스라이팅만으로는 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범죄수사 단계에서 ‘범죄피해평가제도’를 통해 재판과정에서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피해를 증거로 채택한다면 양형에 반영될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 가스라이팅이 심각한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한나 기자

출처: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205